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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시 레이더] 코스피 2.73% 급락⋯중동 쇼크에 5,760선 후퇴
코스피가 19일 중동발 지정학적 긴장과 원·달러 환율 급등 충격 속에 2% 넘게 하락하며 5760선으로 밀려났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이날 코스피는 전장보다 161.81포인트(2.73%) 내린 5763.22에 마감했다. 코스닥도 20.90포인트(1.79%) 하락한 1143.48로 거래를 마쳤다. 원/달러 환율은 17.9원 오른 1501.0원에 주간 거래를 끝내며 다시 1500원 선을 넘어섰다. 국내 증시를 받치고 있는 삼성전자(-3.84%), SK하이닉스(-4.07%) 등 반도체주가 급락했다. 그밖에 현대차(-4.22%), 기아(-2.63%), LG에너지솔루션(-3.26%), POSCO홀딩스(-3.29%) 등도 일제히 약세를 보였다. 반면 KB금융(0.65%), 신한지주(1.58%), 우리금융지주(0.30%)는 상승하며 낙폭을 일부 상쇄했다. 시장에서는 국제유가 급등, 연준의 매파적 신호, 원화 약세가 한꺼번에 투자심리를 짓눌렀다는 분석이 나온다. [미니해설] 유가·환율·연준의 삼각파고…코스피를 덮친 중동 리스크의 경로 코스피가 19일 중동발 지정학적 긴장과 원·달러 환율 급등 충격 속에 2% 넘게 하락하며 5,760선으로 밀려났다. 19일 국내 증시 급락은 단순한 하루짜리 조정이 아니라, 중동 정세 불안이 한국 금융시장에 어떤 경로로 충격을 전이시키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 장세였다. 코스피는 장 초반 5,761.40으로 출발한 뒤 한때 5,738.95까지 밀렸고, 결국 5,763.22에 장을 마쳤다. 코스닥도 1143.48로 내려 동반 약세를 나타냈다. 외환시장에서는 원·달러 환율이 장중 1,505.0원까지 치솟은 뒤 1,501.0원에 마감했다. 주식과 환율이 동시에 흔들렸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위험회피 장세의 성격이 짙었다. 직접적인 충격원은 에너지 가격이었다. 간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사우스파르스 가스전 타격 소식 이후 국제유가가 급등했고, 브렌트유는 18일 종가 기준 배럴당 107.38달러까지 올랐다. 이후 19일 들어서는 한때 112달러선을 웃돌 정도로 불안이 증폭됐다. 원유와 가스 공급 차질 우려가 커지면 한국처럼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경제는 교역조건 악화와 물가 부담 확대 우려를 동시에 떠안게 된다. 증시가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이런 구조적 취약성 때문이다. 여기에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의 신호가 불안을 더 키웠다. 연준은 3월 18일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동결했지만, 경제전망에서는 올해 인플레이션 전망을 높이고 금리 인하 횟수는 1회 수준으로 유지했다. 제롬 파월 의장은 금리 인상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현재의 기본 시나리오는 아니라고 설명했다. 시장은 이를 사실상 매파적 메시지로 받아들였다. 유가 급등이 물가를 다시 자극할 수 있는 상황에서 연준이 서둘러 완화로 돌아서기 어렵다는 판단이 강화되자 달러 강세가 재차 힘을 받았고, 이는 원화 약세와 외국인 위험자산 회피 심리를 자극했다. 국내 증시 내부를 보면 하락의 중심은 역시 대형 수출주였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각각 3.84%와 4.07% 하락하며 지수 하방 압력을 키웠고, 전날 급등했던 현대차(-4.22%)와 기아(-2.63%)도 차익실현과 위험회피 매물에 밀렸다. LG에너지솔루션(-3.26%), 삼성SDI(-0.62%), POSCO홀딩스(-3.29%) 등 이차전지주도 약세를 면치 못했다. 이는 한국 증시가 여전히 반도체, 자동차, 2차전지 같은 경기민감 대형주 비중이 높다는 점을 다시 보여준다. 글로벌 경기와 환율, 원자재 가격이 동시에 흔들릴 때 지수 전체가 더 크게 출렁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다만 삼성전자 와 SK하이닉스 종가는 각각 200,500원, SK하이닉스 1,013,000원으로 각각 상징적 가격선을 지켜낸 점은 추가 급락보다는 변동성 확대 국면으로 보는 시각도 남겼다. 눈에 띄는 대목은 금융주의 상대적 선방이다. KB금융(0.65%), 신한지주(1.58%), 우리금융지주(0.30%)는 상승 마감했고 하나금융지주(-1.14%)만 약세였다. 이는 고환율과 시장 변동성 확대 국면에서 배당 매력과 밸류에이션 방어력이 상대적으로 부각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성장 기대가 큰 기술주나 경기민감주가 흔들릴 때 전통 금융주로 자금이 부분적으로 이동하는 현상이 나타난 셈이다. 물론 금융주 상승만으로 시장 전체를 떠받치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수급이 완전히 한 방향으로 쏠리지는 않았다는 점은 확인됐다. 정부와 한국은행도 이날 이례적으로 강한 경계 메시지를 냈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확대 거시경제금융회의에서 원화 흐름이 펀더멘털과 과도하게 괴리될 경우 적기 대응하겠다고 밝혔고, 유상대 한국은행 부총재도 필요시 시장 안정화 조치에 나서겠다고 했다. 당국이 환율 1,500원 선을 사실상 심리적 경계선으로 보고 있음을 시사한 대목이다. 실제로 전문가들은 당국 경계감과 수출업체 네고 물량이 환율 상단을 일정 부분 제어할 수 있다고 본다. 다만 중동 리스크가 추가로 악화해 유가가 더 오르고 달러 강세가 이어질 경우, 환율과 증시를 둘러싼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이날 코스피 급락은 세 가지 변수가 한꺼번에 겹친 결과다. 첫째는 중동 충돌 격화에 따른 유가 급등, 둘째는 연준의 신중하고 매파적인 태도, 셋째는 그 여파로 나타난 원화 약세와 외국인 수급 불안이다. 한국 증시는 최근 반등 과정에서 단기간에 빠르게 올라 있었던 만큼 대외 충격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시장이 당장 주목할 변수는 유가가 110달러 안팎에서 더 치솟는지, 환율이 1,500원대에서 안착하는지, 그리고 미국 통화정책 기대가 얼마나 더 후퇴하는지다. 이 세 축이 진정되지 않는다면 코스피의 변동성 장세는 당분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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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발 약세, 한강벨트로 번졌다⋯성동 103주 만에 하락 전환
서울 아파트 시장의 약세 흐름이 강남3구를 넘어 한강벨트로 확산하는 모습이다. 한국부동산원이 19일 발표한 3월 셋째 주(16일 기준) 주간 아파트 가격 동향에 따르면 서울 아파트 매매가격은 전주보다 0.05% 올라 상승세를 이어갔지만, 오름폭은 전주 대비 0.03%포인트 줄어 2월 첫째 주 이후 7주 연속 둔화했다. 특히 강남3구와 용산구의 약세가 4주째 이어진 가운데 성동구가 0.06%에서 -0.01%로 돌아서며 2024년 3월 둘째 주 이후 103주 만에 하락 전환했다. 동작구도 0.00%에서 -0.01%로 내려 57주 만에 약세를 보였다. 서초구는 -0.15%, 용산구는 -0.08%로 낙폭이 확대됐고 송파구는 -0.16%, 강남구는 -0.13%를 기록했다. 강동구도 -0.02%로 내림폭이 커졌다. 반면 중구(0.20%), 성북구(0.20%), 서대문구(0.19%), 영등포구(0.15%), 양천구(0.14%), 강서구(0.14%) 등 중저가 지역은 상대적으로 강세를 나타냈다. 시장에서는 5월 9일 양도소득세 중과 유예 종료와 공시가격 상승에 따른 보유세 부담 우려가 고가 주택지 매물 증가로 이어지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미니해설] 한강벨트까지 번진 서울 아파트 조정장…세금·매물·수요 재편의 삼중 압력 강남3구에서 시작된 서울 아파트 가격 조정이 이제는 한강변 핵심 주거벨트로 번지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서울 전체 매매가격이 여전히 상승하고 있지만, 시장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상승장의 동력이 점차 약해지고 있다는 신호가 뚜렷하다. 서울 아파트값은 3월 셋째 주에도 0.05% 올라 플러스를 유지했지만 상승폭이 전주보다 0.03%포인트 줄었다. 2월 첫째 주 이후 7주 연속 오름폭이 축소됐다는 점은 단순한 숨 고르기를 넘어 시장 체력이 전반적으로 떨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흐름의 핵심은 약세 지역의 확산이다. 그동안 조정의 중심은 토지거래허가구역 재지정, 대출 규제, 가격 부담이 집중된 강남3구와 용산구였다. 실제로 서초구는 -0.15%, 강남구는 -0.13%, 송파구는 -0.16%, 용산구는 -0.08%를 기록하며 4주째 약세를 이어갔다. 주목할 지점은 이 하락 흐름이 더 이상 특정 초고가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성동구가 103주 만에 하락 전환했고, 동작구도 57주 만에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성동과 동작은 각각 강북권과 강남 접근성을 동시에 갖춘 대표적 한강벨트 지역으로 꼽힌다. 이들 지역의 약세 전환은 상급지 선호가 여전하더라도 가격 부담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수요가 더는 추격 매수에 나서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부동산원도 시장 참여자의 관망세가 짙어졌다고 진단했다. 일부 단지에서 하락 매물이 등장하고, 가격을 낮춘 계약이 체결되고 있다는 설명은 최근 서울 주택시장의 분위기를 압축한다. 급등기에 형성된 호가가 실제 거래가격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매수자는 추가 조정을 기다리며 한 발 물러선 상태다. 반면 매도자 가운데서는 더 늦기 전에 처분하려는 움직임이 점차 늘고 있다. 이 같은 변화의 배경에는 세금과 보유 부담이 있다. 우선 5월 9일로 예정된 양도소득세 중과 유예 종료가 다주택자 매물 출회를 자극하고 있다. 세율이 다시 무거워지기 전에 매도를 선택하려는 수요가 움직이고 있다는 의미다. 여기에 올해 공동주택 공시가격이 큰 폭으로 오른 점도 부담을 키우고 있다. 이번 주간 가격 동향에는 아직 공시가격 열람 개시 영향이 반영되지 않았지만, 시장은 이미 다음 변수를 선반영하기 시작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서울 평균 공동주택 공시가격이 지난해보다 18.67% 오르면서 일부 단지에서는 보유세가 최대 50%까지 늘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특히 현금흐름이 제한적인 고령 1주택자에게는 세 부담이 체감 리스크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실거주 의지는 있지만 세금 증가를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 매도를 선택하는 사례가 늘어날 수 있다. 이 점에서 이번 조정은 단순한 가격 피로감만의 문제가 아니다. 세제 변화, 보유비용 증가, 거래 심리 위축이 동시에 맞물리는 구조적 조정 성격을 띠고 있다. 남혁우 우리은행 부동산연구원이 "강남3구발 가격조정 흐름이 인접 주요 자치구와 한강벨트로 확산하는 추세"라고 진단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강남의 약세가 주변 지역으로 전염되는 이유는 심리적 연동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서울 주택시장은 행정구역별로 나뉘어 보이지만, 실제 매수자들은 강남·용산·성동·동작·마포 등 인접 생활권을 묶어서 비교한다. 강남권이 밀리면 인근 상급지의 상대적 가격 매력도도 함께 흔들리게 된다. 반면 모든 지역이 약한 것은 아니다. 중구, 성북구, 서대문구, 영등포구, 양천구, 강서구처럼 상대적으로 중저가 매물이 많은 지역은 여전히 높은 상승률을 나타냈다. 이는 서울 시장이 일괄 하락 국면에 들어섰다기보다, 가격대별·지역별 차별화가 심해지고 있음을 뜻한다. 고가 주택 밀집 지역에서는 세 부담과 매물 증가가 가격을 누르고, 중저가 지역에서는 실수요가 받쳐주며 상승이 이어지는 이중 구조가 나타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장의 중심축이 '상급지 추격 매수'에서 '가격 부담이 덜한 실거주 지역 선호'로 이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으로의 관전 포인트는 두 가지다. 첫째는 공시가격 현실화에 대한 시장 반응이다. 현재도 고가 지역에서는 관망세가 짙지만, 실제 보유세 예상치가 구체화되면 추가 매물이 더 나올 가능성이 있다. 둘째는 그 매물이 어느 정도 가격 조정을 만들지 여부다. 아직 서울 전체 지표는 상승을 유지하고 있어 본격 하락장으로 단정하기는 이르다. 다만 상승폭 축소가 길어지고, 한강벨트 핵심지까지 약세 전환이 확인된 만큼 시장의 무게중심이 분명히 바뀌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서울 아파트 시장은 지금 '전면 상승장'에서 '선별 조정장'으로 국면이 이동하는 초입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강남3구의 약세는 더 이상 국지적 현상이 아니며, 성동·동작 등 한강벨트의 변화는 그 파급력이 이미 확산 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세금 부담과 매물 증가, 실수요 재편이라는 세 가지 변수가 동시에 작동하는 만큼 당분간 서울 주택시장은 지역별 온도 차를 키우면서 조정 압력을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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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 89] 묵호 사용 설명서(6회)
질퍽한 골목의 시학 -묵호 '논골'을 아세요? 이름은 땅이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언어다. 마을 이름, 골목 이름, 고개 이름. 행정이 붙여주는 이름이 있고 삶이 스스로 만드는 이름이 있다. 앞의 이름은 지도 위에 있고 뒤의 이름은 사람들의 입안에 있다. 지도가 바뀌어도 입안의 이름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지명의 질긴 생명력이다. 묵호진동의 언덕 골목을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논골'이라 불렀다. 공식 기록에도 구전에도 이 이름은 남아 있다. 동해시 지명지는 이렇게 적어 놓았다. '산 중턱에 논이 있어서 생긴 이름.' 그러나 골목에서 오래 살아온 어르신들의 구전은 조금 다르다. 마을 절반은 뱃사람, 절반 위는 덕장으로 생계를 유지한 마을이라 '질퍽한 흙길 때문에 논골마을이라 불렸다.' 두 가지 해석 중 어느 쪽이 맞는가를 따지는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두 해석 모두 이 땅의 몸을 읽은 결과라는 사실이다. 물이 흐르는 골목 논골 골목이 왜 질퍽했는지를 이해하려면 언덕 꼭대기를 먼저 봐야 한다. 지금은 대부분 장소를 옮기거나 사라진 곳이지만 언덕 가장 높은 곳에는 덕장이 있었다. 오징어와 명태를 말리는 곳. 어부들이 잡아 온 생선을 묵호항에서 덕장까지 나르는 일이 마을 사람들의 일상이었다. 바지게에 지거나 빨간 고무대야에 담아서. 올라가는 길은 가파르고 짐은 무겁다. 그 과정에서 생선 더미에서 떨어지는 바닷물이 골목을 적셨다. 오징어는 특히 물기가 많다. 막 잡아 올린 오징어를 담은 대야를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가파른 비탈을 오를 때, 흔들릴 때마다 바닷물이 튀고 흘렀다. 하루에 한 번이 아니었다. 풍어의 계절에는 하루에도 수백 번씩 오르내렸다. 골목의 흙은 늘 젖어 있었다. 비가 오지 않아도 젖어 있었다. 그것이 '논골'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 이름 안에 당시 마을의 경제 전체가 들어 있다. 골목이 질퍽하다는 것은 그만큼 생선이 많이 오르내렸다는 뜻이고, 생선이 많이 오르내렸다는 것은 어획이 풍성했다는 뜻이고, 어획이 풍성했다는 것은 사람들이 먹고살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이름 속에 풍요와 고단함이 함께 녹아 있다. 장화가 없으면 살 수 없는 도시의 언어 그래서 생긴 말이 있다. 앞서도 인용했지만, 이 말은 한 번으로 부족하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 이 문장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웃었다. 그러다가 멈췄다. 이것은 농담이 아니었다. 묵호에서만 통용되는 실용의 언어였다. 신발이 방수되지 않으면 하루도 버티기 어려운 골목. 젖은 신발로 하루를 보내면 발이 무르고 병이 든다. 장화는 이 마을에서 생존 도구였다. 그리고 이 말은 동시에 비틀린 유머다. 아내보다 장화가 더 필요하다는 과장은, 이 마을에서 먹고사는 일이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웃음으로 표현한 것이다. 묵호 사람들은 그렇게 유머를 썼다. 슬프거나 고단한 것을 직접 말하지 않고, 과장하거나 뒤집어서 웃음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이 마을의 언어 습관이고 생존 미학이다. 논골담길 곳곳에 장화 그림과 장화 소품이 등장하는 것은 이 마을이 통과한 역사의 물질적 상징이다. 아이가 신던 작은 장화에 들꽃을 심어놓은 담벼락 위의 풍경은, 그 장화가 더 이상 질퍽한 골목을 걸을 필요가 없어진 시대를 살고 있는 마을이 과거에 바친 조용한 헌사다. 논골담길이라는 이름을 정하던 날이 생각난다. 2010년 봄, 한국문화원연합회 공모사업에 응모하기로 결심하고 지역 작가들과 머리를 맞댔다. 마을 이름이 논골이니 거기서 시작하자는 것은 금방 합의됐다. 문제는 그 뒤였다. '논골길'은 너무 밋밋했다. '논골마을길'은 길다. '논골산책로'는 이 마을의 결을 배신하는 이름이었다. 산책은 여유 있는 자들의 행위다. 이 골목은 여유가 아니라 생존으로 오르내린 사람들의 땅이다. 산책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것은 그 역사를 지우는 일이었다. 글 담당으로 참여한 김정호 작가와 긴 논의 끝에 '담(談)'이라는 글자를 끌어왔다. 이야기가 있는 길. 담장의 담(墻)이 아니라 이야기의 담(談). 한자를 모르는 사람도 소리로 읽으면 '담'은 담장으로도, 이야기로도 들린다. 이 중의성이 좋았다. 담장이 있는 골목이고, 이야기가 있는 골목이고, 그 이야기들이 담장 위에 그림으로 새겨지는 골목. 세 가지 뜻이 하나의 소리 안에 겹쳐 있었다. 논골담길. 입에 올려보니 발음이 자연스러웠다. 기억하기도 쉬웠다. 취재 기자들이 반응했다. "길 이름이 왜 이래요?"가 아니라 "이름이 좋네요"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이름은 첫 번째 기획이다. 좋은 이름은 설명하지 않아도 방향을 가리킨다. 논골 골목은 좁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 어려운 곳이 많다. 앞서가는 사람을 따라간다. 보면 어느새 다른 골목으로 빠져 있다. 미로처럼 얽혀 있다. 처음 온 사람은 길을 잃는다. 나는 이것이 결점이 아니라 자질이라고 생각한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예측을 잃는다는 것이다. 예측을 잃으면 감각이 살아난다. 다음 모퉁이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니 발걸음이 느려진다. 느린 발걸음은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한다. 논골담길을 처음 기획할 때 코스를 명확하게 표시하지 말자는 의견이 있었다. 지도를 주되 헤매도록 내버려두자는 것. 나는 그 의견에 동의했다. 완성된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이 완성되는 과정을 돕는 것. 그것이 이 마을이 여행자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었다. 실제로 논골담길에서 가장 좋은 장면을 만나는 사람들은 코스를 벗어난 곳에서 그것을 만난다. 해설사가 안내하는 경로 밖에 있는 담벼락, 예상치 못한 골목 끝에서 불쑥 열리는 묵호항의 전망. 길을 잃어야 찾게 되는 것들이 있다. 논골이 바로 그런 종류의 장소다. 질퍽함의 미학 물기가 있는 땅은 생명력이 있다. 건조한 땅에서는 풀이 잘 자라지 않는다. 질퍽한 곳에서 식물이 무성해진다. 논골이 질퍽했던 것은 생선의 물기 때문이었지만, 그 질퍽함은 동시에 이 마을이 얼마나 살아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했다. 마을이 쇠퇴하면서 덕장이 사라지고 골목을 오르내리는 지게꾼이 사라졌다. 골목은 건조해졌다. 비가 올 때만 질퍽해지고, 비가 멈추면 곧 말라버리는 보통의 골목이 됐다. 사람이 줄고 집이 비면서 마을은 점점 건조해졌다. 논골담길이 시작됐을 때 골목에 다시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작가들이 왔고 사진가들이 왔고 관광객들이 왔다. 골목이 다시 소리를 냈다. 발소리와 말소리와 웃음소리. 그것은 오징어 물기와는 다른 질퍽함이었지만, 마을을 다시 살아 있게 만드는 어떤 수분이었다. 문화 기획이 마을에 공급하는 것이 결국 이런 것이라는 생각을 그때 처음 했다. 아카이브로서의 지명 지명은 가장 오래된 형식의 아카이브다. 문자가 생기기 전부터 사람들은 장소에 이름을 붙였다. 그 이름 안에 지형이 있고 역사가 있고 삶의 방식이 있다. 논골이라는 이름 안에 오징어 물기로 젖은 골목이 있고, 지게를 진 남자들이 있고, 빨간 고무대야를 이고 오른 어머니들이 있다. 논문을 쓰면서 나는 지역문화 아카이브의 공공영역이라는 주제를 오래 붙들고 있었다. 아카이브가 공공의 것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전문가만 접근할 수 있는 보관소가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역사를 찾아 읽을 수 있는 살아 있는 기록이 되려면. 논골이라는 이름은 그 답의 일부다. 별도의 데이터베이스가 없어도, 디지털 아카이브 시스템이 없어도, 이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있는 한 그 역사는 살아 있다. 그리고 그 이름이 논골담길이라는 길 이름 속에 새겨지고, 해설사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벽화와 이야기로 거듭 태어날 때, 지명 아카이브는 공공의 것이 된다. 이름이 먼저 왔다 논골담길 프로젝트를 돌아보면 이름이 먼저 온 것이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먼저 이야기 발굴이 있었고, 먼저 마을의 삶이 있었고, 그것을 담을 그릇으로 이름이 만들어졌다. 역순이 아니었다. 이름이 먼저 생기고 나중에 내용을 채운 것이 아니었다. 많은 마을 재생 프로젝트가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름이 먼저 생기는 것이다. 00 아트빌리지, 00 감성마을, 00 문화거리. 이름이 그럴싸하면 마을의 현실이 거기 맞춰져야 한다는 압력이 생긴다. 마을은 이름의 틀에 끼워 맞춰지고, 결국 이름이 마을을 배신하거나 마을이 이름을 배신하는 사태가 온다. 논골담길은 반대였다. 마을이 먼저였다.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가 먼저 모였고, 그 이야기들이 어떤 성격인지를 확인한 뒤에야 이름을 붙였다. 그러니 이름이 마을을 배신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도 그 이름을 낯설어하지 않았다. 논골은 오래전부터 그들의 입안에 있었다. 우리는 거기에 '담길'을 붙인 것뿐이었다. 논골 골목의 흙이 마르는 날이 올 수도 있다. 집이 더 비고 사람이 더 떠나면, 언젠가는 오르내리는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름은 남는다. 논골이라는 이름이 남는 한, 한때 이 골목이 오징어 물기로 질퍽했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그것이 문화기획이 할 수 있는 일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마을을 영원히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도시는 흥하고 쇠한다. 그것이 도시의 운명이다. 그러나 이름을 새기는 것,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 그림으로 남기는 것은 가능하다. 묵호가 언젠가 지금과 전혀 다른 도시가 되더라도, 논골담길이라는 이름이 살아 있는 한 이 질퍽한 골목의 기억은 살아 있다. 이름이 집보다 오래 살고, 사람보다 오래 산다. 논골이라는 이름은 아마도 이 마을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필자 소개> 조연섭 -문화 기획자, 브치 작가, 논골담길 기획 조연섭 작가는 숨겨진 원형을 발굴해 현대적 콘텐츠로 재탄생시키는 문화 기획자이자 작가다. 언더그라운드 방송 DJ와 아나운서를 거친 방송인 출신으로, 2004년 동해문화원 공채 사무국장으로 임용 한국문화원국장협의회 수석부회장을 역임하고 2025년 12월30일 퇴직했다. 그는 그동안 지역의 역사와 유휴 공간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인구 소멸 시대의 실천적 해법을 제시해 왔다. 그의 기획력은 공간 재생과 로컬 브랜딩에서 특히 빛을 발한다. 묵호 '논골담길' 프로젝트를 통해 청와대에서 창조경제 성공 사례를 발표하며 문화 담론을 주도했다. 또한, 방치된 양조장을 커뮤니티 거점으로 복원한 '강원막걸리학교(막걸리 익는 홍월평)' 사업을 통해 지역 경제와 공동체가 공존하는 지속 가능한 모델을 구축했다. 예술적 감각 또한 남다르다. 국가유산청 공모로 뮤지컬 '동해의 선선 심동로'와 '동해랑'을 기획하여 지역민에게는 자긍심을, 관광객에게는 깊은 감동을 선사하는 로컬 콘텐츠의 전형을 만들었다. 이러한 공로로 대한민국 문화원상 '창의 인재상'을 받았으며, 전국 문화원 임직원을 대상으로 추진한 지역 문화경영 고급 아카데미 전국 1위와 함께 문체부 장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현재는 인생 2막을 준비하는 공론장 '논골담길 커먼즈'와 함께 24시 문화 순환 체계 연구를 준비하고 있다. 또한 브런치 작가로서 《논골담길》, 《맨발 걷기》 등의 브런치 북을 발간하며, 현장의 기록을 글에 담아 사람과 공간을 잇는 활발한 집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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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처 Eyes(126)] 소행성 류구에서 생명의 알파벳 5종 완전 발견
인류가 우주 공간에서 직접 퍼 올린 소행성 류구 암석 가루에서 생명체를 구성하는 모든 유전 알파벳이 발견됐다. 일본 우주항공연구개발기구(JAXA)의 탐사선 하야부사 2호(Hayabusa2)가 소행성 류구(162173 Ryugu)에서 채취해 지구로 귀환시킨 시료에서, DNA와 RNA를 구성하는 아데닌(A), 구아닌(G), 시토신(C), 티민(T), 우라실(U) 등 다섯 가지 핵심 염기가 모두 확인됐다. 해양연구개발기구(JAMSTEC) 소속 생물지구화학자 코가 토시키(Toshiki Koga) 박사가 이끈 연구팀이 이러한 분석 결과를 지난 16일(현지 시간) 국제 학술지 《네이처 천문학(Nature Astronomy)》에 발표했다(DOI: 10.1038/s41550-026-02791-z). 지구 생명체의 기원이 척박한 우주 공간에서 날아온 암석에 있다는 이른바 외인성 유기물 전달 가설(exogenous delivery hypothesis)에 또 하나의 강력한 물증이 더해진 셈이다. 이미 지난해 NASA의 오시리스-렉스(OSIRIS-REx) 탐사선이 소행성 벤누(Bennu)에서 가져온 시료에서도 동일한 5종 염기가 검출된 바 있어, 이번 류구 발견은 생명의 분자적 재료가 태양계 전역에 보편적으로 분포하고 있음을 독립적으로 재확인한 결정적 성과로 평가된다. 핵염기란 무엇인가…'생명의 알파벳'을 이해하는 기초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DNA(디옥시리보핵산)와 RNA(리보핵산)라는 유전 물질을 설계도로 삼아 생명 활동을 영위한다. 이 정교한 설계도를 작성하는 글자가 바로 핵염기(nucleobase)다. 아데닌과 구아닌은 이중 고리 구조의 퓨린(purine)계, 시토신과 티민 그리고 우라실은 단일 고리 구조의 피리미딘(pyrimidine)계로 분류된다. DNA에서는 아데닌이 티민과, 구아닌이 시토신과 짝을 이루어 이중 나선 구조의 가로대를 형성하고, RNA에서는 티민 대신 우라실이 아데닌과 결합한다. 이들 5종 염기에 당(sugar)과 인산(phosphate)이 결합하면 뉴클레오타이드가 되고, 뉴클레오타이드가 사슬처럼 이어지면 DNA와 RNA라는 거대 분자가 완성된다. 또한 핵염기는 아데노신삼인산(ATP) 등 세포의 에너지 통화를 구성하는 데에도 핵심적으로 관여한다. 한마디로, 핵염기는 생명 현상의 정보 저장·전달·에너지 대사를 관장하는 가장 근본적인 분자 부품이다. 이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거대한 인쇄소를 떠올려 볼 수 있다. 타자기를 친 적이 없는 무인도에서 다섯 가지 핵심 알파벳이 새겨진 금속 활자 블록이 완벽한 세트로 발견된 것과 같다. 글을 쓰는 주체인 지적 생명체가 없더라도, 글자를 구성하는 블록 자체는 우주의 극한 환경에서 화학적 반응만으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질 수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아미노산이 생명체의 벽돌이라면, 이번에 발견된 염기 5종은 그 벽돌을 어떻게 쌓을지 지시하는 건축 설계도에 해당한다. 20밀리그램의 기적…극소량 시료에서 끌어낸 5종 염기의 완전한 세트 코가 박사 팀이 분석에 사용한 류구 시료는 총 약 20밀리그램에 불과했다. 이는 하야부사 2호가 2018~2019년 류구 표면의 서로 다른 두 지점에서 터치다운(착지) 방식으로 채취한 것으로, 첫 번째 지점의 시료와 두 번째 지점의 시료 모두에서 5종 염기가 검출됐다. 연구팀은 극소량 시료에 최적화된 추출 프로토콜을 새로 개발했는데, 뜨거운 물과 염산으로 유기물을 추출한 뒤 액체 크로마토그래피와 고해상도 질량분석법을 결합해 핵염기를 분리·동정했다. 미국 메릴랜드대학교 볼티모어카운티캠퍼스(UMBC)의 우주화학자 해나 맥레인(Hannah McLain) 박사(NASA 고다드 우주비행센터 소속)는 이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외부 전문가로서, 코가 박사 팀이 기존의 확립된 추출 공정을 극소량 시료에 맞춰 정밀하게 개량한 방법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또한 연구팀은 동위원소 분석 등을 통해 검출된 핵염기가 지구 기원의 오염물질이 아니라 류구 고유의 물질임을 교차 검증했다. 46억 년의 타임캡슐 류구…지구 오염 원천 차단한 '순백의 증거' 이번 발견이 지니는 압도적인 학술적 가치는 샘플의 출처인 류구의 특성에서 비롯된다. 류구는 태양계가 처음 형성되던 약 46억 년 전의 물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탄소질(C형) 소행성이다. 지구와 화성 사이의 궤도를 도는 이 팽이 모양의 천체는 지름 약 900미터로, 그 광물학적·원소적 조성이 가장 원시적인 운석 그룹인 CI 콘드라이트와 유사하다. CI 콘드라이트는 초기 태양계의 원소 조성을 가장 잘 반영하는 물질로 알려져 있어, 류구를 분석한다는 것은 곧 태양계가 막 태어나던 시절의 화학 조건을 직접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과거에도 지구에 떨어진 운석에서 아미노산이나 일부 염기가 발견된 적은 있다. 1969년 호주 빅토리아주에 떨어진 머치슨(Murchison) 운석이나 1864년 프랑스 남부에 떨어진 오르괴유(Orgueil) 운석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이 운석들은 지구 대기권을 통과해 땅에 떨어지는 과정에서 지구의 토양 미생물이나 화학 물질에 오염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웠다. 지구의 생명 물질이 묻은 것인지, 본래 우주에서 품고 온 것인지 확언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반면 류구 시료는 하야부사 2호가 우주 공간에서 직접 소행성 표면의 흙과 암석을 채취한 뒤, 완벽하게 캡슐에 밀봉하여 2020년 12월 5일 호주 우메라(Woomera) 사막에 착지시킨 것이다. 총 5.4그램의 시료는 극도로 엄격한 무균 환경에서 보관·분석되었다. 다만 2024년 11월 발표된 후속 연구에 따르면, 실험실 환경에서도 지구 미생물이 시료에 급속히 침투할 수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류구 시료의 취급에 여전히 극도의 주의가 필요함이 재확인됐다. 그럼에도 우주 공간에서의 채취-밀봉이라는 과정 자체가 오염 가능성을 원천 차단한다는 점에서 류구 시료의 과학적 신뢰도는 지상 수집 운석과는 비교할 수 없다. 소행성마다 다른 '화학적 레시피'…암모니아가 쥔 미지의 열쇠 코가 박사 팀은 류구의 분석 결과를 머치슨 운석, 오르괴유 운석, 그리고 NASA의 오시리스-렉스 탐사선이 소행성 벤누에서 채취해 온 시료와 정밀하게 대조하는 작업을 병행했다. 그 결과 흥미로운 차이점이 드러났다. 류구는 퓨린계 염기(아데닌·구아닌)와 피리미딘계 염기(시토신·티민·우라실)의 비율이 엇비슷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퓨린 대 피리미딘 비율 약 1.1~1.2). 반면 머치슨 운석은 퓨린계 염기가 훨씬 풍부했고(비율 약 3.4), 벤누(약 0.55)와 오르괴유 운석(약 0.10)은 피리미딘계 염기를 더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 연구팀은 머치슨 운석의 높은 퓨린 비율이 시안화수소(HCN) 중합 경로에 의한 것으로 추정하는 한편, 류구·벤누·오르괴유에서 나타나는 낮은 퓨린/피리미딘 비율은 HCN 중합과는 다른 대안적 합성 경로가 주된 역할을 했음을 시사한다고 분석했다. 더욱 주목할 만한 발견은 따로 있었다. 류구, 베누, 오르괴유처럼 광물학적·원소 조성이 유사한 시료들에서 퓨린 대 피리미딘 비율이 암모니아 농도와 강한 역상관관계(R²=0.89)를 보였다는 것이다. 암모니아가 많을수록 피리미딘이 더 풍부해지는 패턴이었다. 연구 제1저자인 코가 토시키 박사는 "기존에 알려진 어떤 염기 합성 메커니즘도 이러한 관계를 예측하지 못했기에, 이는 초기 태양계 물질에서 핵염기가 형성되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새로운 경로가 존재할 가능성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연구팀은 이 퓨린/피리미딘 비율이 탄소질 소행성과 운석 간의 핵염기 화학적 차이를 구별하는 새로운 분자 지표로 활용될 수 있다고 제안했다. 뉴질랜드 빅토리아대학교 웰링턴캠퍼스의 모건 케이블(Morgan Cable) 박사는 이 암모니아-염기 비율 간 상관관계 발견을 '독특한(unique) 성과'로 평가하며, '이 발견이 생물학적으로 중요한 분자들이 최초에 어떻게 형성되어 지구에서 생명의 탄생을 촉진했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고 논평했다. 요소(Urea)의 발견과 'RNA 세계 가설'의 연결고리 이번 연구에서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았지만 과학적으로 중요한 또 하나의 발견은 류구 시료에서 상당량의 요소(urea)가 검출됐다는 점이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CNRS)의 살반(Salvan) 박사는 이 결과에 특히 높은 관심을 표명하며, '우리 연구팀은 오랫동안 요소가 RNA 구성 블록의 필수 전구체라고 제안해 왔으며, 이번 연구는 우주에서 직접 채취한 시료에 기반한 증거를 제공한다'고 평가했다. 이는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유력한 가설 중 하나인 'RNA 세계 가설(RNA World Hypothesis)'과 직결된다. RNA 세계 가설은 DNA와 단백질이 등장하기 이전에, RNA가 유전 정보의 저장과 촉매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며 최초의 자기 복제 시스템을 구성했다는 이론이다. 2026년 2월 《사이언스》에 발표된 최신 연구에서는 불과 45개 뉴클레오타이드로 구성된 초소형 RNA 효소(리보자임)가 다른 RNA 가닥을 복제하는 중합효소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음이 밝혀져, 자기 복제 RNA 분자가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단순하고 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됐다. 류구에서 발견된 5종 핵염기와 요소는 이러한 RNA 세계의 출발점이 우주 공간에서 이미 준비되어 있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핵염기에 당류와 인산이 결합하면 RNA 분자가 조립될 수 있고, 요소는 이 과정의 핵심 전구체 역할을 한다. 초기 지구에 쏟아진 소행성들이 이 모든 재료를 한꺼번에 배달했다면, RNA 세계로의 진입 문턱은 종전의 예상보다 현저히 낮아지는 셈이다. 베누와의 비교…두 소행성이 완성하는 퍼즐 이번 류구 연구 결과는 지난 2025년 1월 발표된 벤누 시료 분석 성과와 짝을 이루며 더욱 강력한 설득력을 갖는다. NASA 고다드 우주비행센터의 대니얼 글래빈(Daniel Glavin) 박사팀이 이끈 베누 분석에서는 5종 핵염기뿐만 아니라 지구 생명체가 단백질 합성에 사용하는 20종 아미노산 가운데 14종, 그리고 예외적으로 풍부한 암모니아가 함께 검출됐다. 베누 시료에서는 이전에 어떤 운석이나 소행성 귀환 시료에서도 발견된 적 없는 15번째 단백질 구성 아미노산인 트립토판(tryptophan)이 잠정적으로 검출되기도 했다. 베누 시료의 질소 함유 헤테로고리 화합물 농도는 류구보다 5~10배 높았으며, 질소-15 동위원소 농축 패턴은 암모니아와 기타 질소 함유 용해성 분자들이 저온의 분자운(molecular cloud)이나 원시행성계 원반의 외곽 영역에서 형성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베누의 모체(parent body)가 목성 궤도 너머의 태양계 외곽, 즉 토성 궤도 이원(以遠)의 극저온 지역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결정적으로, 지구 오염 가능성이 배제된 순수 우주 시료에서 5종 핵염기가 확인된 것은 이제 류구와 베누, 두 곳에서 독립적으로 재현된 결과다. 코가 토시키 박사는 Sky & Telescope와 인터뷰에서 "류구와 베누라는 두 탄소질 소행성 모두에서 5종 핵염기가 검출되었다는 사실은, 이 분자들이 태양계 원시 천체들에 광범위하게 존재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핵염기가 운석과 소행성 충돌을 통해 초기 지구에 전달되어 생명의 기원에 필요한 유기물 목록에 기여했을 가능성을 강화한다"고 주장했다. 생명까지의 거리…여전히 남은 과학적 간극 류구와 베누의 발견이 아무리 흥분되는 성과라 하더라도, 핵염기의 존재가 곧바로 생명의 탄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짚을 필요가 있다. 코가 박사 자신도 AF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번 결과가 류구에 생명이 존재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명확히 선을 그었다. 생명에는 핵염기 외에도 당류(리보스, 디옥시리보스), 인산 화학, 세포막을 구성하는 지질, 에너지 기울기, 그리고 자기 복제로 나아가는 경로 등 훨씬 더 많은 요소가 필요하다. 핵염기가 더 큰 생체 시스템에 어떻게 통합되었는지, 소행성 충돌이라는 극단적 에너지 환경에서 이 분자들이 의미 있는 양만큼 온전하게 지구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도 아직 완전히 규명되지 않았다. 또한 류구와 베누의 화학 조성이 서로 다르듯, 어느 하나의 소행성이 초기 태양계 전체를 대표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핵심적인 메시지는 분명하다. 생명의 설계도 분자가 생물학적 과정 없이도 우주 환경에서 자연적으로 합성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반복적으로 확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생명 탄생에 필요한 분자적 전제조건이 지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태양계 전반에 걸쳐 보편적으로 충족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음 목적지…하야부사 2호의 연장 임무와 MMX의 화성 위성 탐사 이 연구 성과를 낳은 하야부사 2호는 아직 임무를 끝내지 않았다. 류구 시료 캡슐을 지구에 투하한 뒤 남은 연료로 연장 임무(Hayabusa2#, SHARP)에 돌입한 이 탐사선은 2026년 7월 S형 소행성 토리후네(98943 Torifune, 구 2001 CC21)에 고속 근접 비행(플라이바이)을 수행할 예정이다. 이 플라이바이는 소행성 충돌 궤도 유도 기술의 시험대로, 지구방위(Planetary Defense) 기술 개발에 직접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후 2031년에는 직경 수십 미터에 불과한 초소형 고속 회전 소행성 1998 KY26과 랑데부할 계획이다. 최근 1998 KY26은 중력 외의 가속이 관측되는 '암흑 혜성(dark comet)'일 가능성이 제기되어 더욱 과학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일본의 소행성 시료 귀환 탐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JAXA는 2026년 회계연도에 화성 위성 탐사선 MMX(Martian Moons eXploration)를 발사할 예정이다. 이 탐사선은 화성의 두 위성 가운데 안쪽 위성인 포보스(Phobos)에 착륙하여 표면 물질 10그램 이상을 채취한 뒤 2031년 지구로 귀환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포보스가 포획된 소행성인지, 아니면 화성에 거대 충돌이 일어나 생겨난 파편인지를 가려내는 것이 핵심 목표로, 만약 전자라면 류구·벤누에서와 유사한 유기물이 발견될 수 있고, 후자라면 화성의 원시 물질에 대한 창을 열게 된다. 나아가 JAXA는 2030년대에 혜성으로부터의 시료 귀환을 목표로 하는 차세대 소천체 시료 귀환 미션(NGSR)도 구상 중이다. 우주는 생명의 씨앗으로 가득 찬 역동적 공간 태양계 형성 초기, 소행성들이 탄생한 위치나 겪어온 열과 물의 작용 등 진화 역사가 제각각이었다. 우주의 다양한 환경에서 각기 다른 비율로 유기물이 합성되었고, 이 다채로운 화학적 다양성을 품은 거대한 암석들이 초기 지구에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면서 생명이 탄생할 수 있는 최적의 '원시 수프(primordial soup)'를 완성했을 것으로 관측된다. 호주 커틴대학교의 지구화학자 클리티 그라이스(Kliti Grice) 교수는 《더 컨버세이션》 기고문에서 이번 성과의 의미를 이렇게 요약했다. 우리 행성 생명의 이야기는 지구의 고대 진흙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우주를 떠돌던 차갑고 원시적인 암석의 화학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척박한 암석 덩어리 위에서도 생명의 설계도 분자가 자연적으로 조립될 수 있다면, 적당한 온도와 물을 갖춘 외계의 어느 행성에서도 생명이 싹트지 못할 이유는 없다. NASA의 오시리스-렉스 프로젝트 과학자 제이슨 드워킨(Jason Dworkin) 박사가 남긴 물음이 여운을 남긴다. NASA 고다드 우주비행센터 제이슨 드워킨(Jason Dworkin) 박사는 "오시리스-렉스의 데이터는 생명의 가능성으로 가득 찬 태양계의 그림에 굵직한 붓질을 더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지구에서만 생명을 보고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하는 이유, 그것이야말로 진정 매혹적인 질문이다"고 말했다. 우주는 텅 비어 있는 죽음의 공간이 아니라, 언제든 생명을 피워낼 준비를 마친 유기물 씨앗들로 가득 찬 역동적인 공간으로서의 본질을 증명해 내고 있다. 【논문 출처】 Toshiki Koga et al., “A complete set of canonical nucleobases in the carbonaceous asteroid (162173) Ryugu,” Nature Astronomy (2026). DOI: 10.1038/s41550-026-02791-z 관련 핵심 선행 논문 • Y. Oba et al., “Uracil in the carbonaceous asteroid (162173) Ryugu,” Nature Communications 14, 1292 (2023). • D.P. Glavin et al., “Abundant ammonia and nitrogen-rich soluble organic matter in samples from asteroid (101955) Bennu,” Nature Astronomy (2025). • Prebiotic organic compounds in samples of asteroid Bennu indicate heterogeneous aqueous alteration, PNAS (2025). 참고 보도 및 기사 Space.com, Phys.org(AFP), C&EN(미국화학회), The Conversation, Smithsonian Magazine, Sky & Telescope, Gizmodo, ZME Science, The Register, Nature Asia, Scimex, JAMSTEC 보도자료, JAXA IS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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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밀리터리] 獨 '스웜 바이오택틱스', 생체 로봇 바퀴벌레 개발⋯전장 침투의 신지평
하늘을 뒤덮은 드론이 현대전의 양상을 바꾼 지 불과 몇 년 만에, 이제 전장의 눈은 인간의 시야가 닿지 않는 '미시적 영역'으로 파고들고 있다. 독일 카셀(Kassel) 소재의 방산 스타트업 스웜 바이오택틱스(SWARM Biotactics)가 살아있는 바퀴벌레와 최첨단 로봇 기술을 결합한 '바이오 하이브리드(Bio-Hybrid)' 정찰 로봇을 선보이며 전 세계 국방 관계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고 더 디펜스 포스트, 펀자브 케사리 등 외신들이 18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 기술은 이미 실험실을 벗어나 NATO 동맹국과의 현장 실증을 완료한 단계에 이르렀다. SF가 현실로…'사이보그 곤충'의 탄생 전장에 바퀴벌레를 투입한다는 발상은 SF 영화의 한 장면처럼 들릴 수 있지만, 그 기술적 배경은 생각보다 오래되고 깊다. 미국 국방고등연구계획국(DARPA)은 이미 2006년부터 'HI-MEMS(Hybrid Insect Micro-Electro-Mechanical Systems)' 프로그램을 통해 곤충의 신경계에 전자 장치를 이식하는 연구를 추진해 왔다. 미시간대, 코네노대, 유니콘별레 등 다양한 곤충을 대상으로 원격 조종 실험에 성공했으나, 배터리 수명과 소형화의 벽을 넘지 못해 실전 배치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스웜 바이오택틱스는 이 20년 간의 연구 유산을 계승하면서도, 결정적으로 한 발 더 나아갔다. 2024년 창업한 이 회사는 불과 1년 만에 총 1300만 유로(약 223억 원)의 투자를 유치하며, 기술을 연구실에서 건져내 실전 배치 단계로 이행시켰다. 슈테판 빌헬름(Stefan Wilhelm) CEO는 지난 2월 "1년 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던 기술이 오늘날 NATO 고객에게 현장 테스트를 완료한 상태로 배치되고 있다"고 밝혔다. 어떻게 작동하나…'백팩' 속에 집약된 첨단 기술 이번에 공개된 기술의 핵심은 바퀴벌레의 등에 장착되는 초소형 전자 '백팩'에 있다. 주로 사용되는 곤충은 마다가스카르 휘싱바퀴벌레(Madagascar Hissing Cockroach)로, 체구가 크고 내구성이 강하며 최대 3g의 페이로드를 운반할 수 있어 이 임무에 최적화된 종이다. 통제된 환경에서 2~5년까지 생존할 수 있어 장기 임무에도 적합하다. 백팩에는 다섯 가지 핵심 기술이 집약되어 있다. 첫째, 생체전자 신경 인터페이스(Bioelectronic Neural Interface)를 통해 바퀴벌레의 더듬이에 부착된 전극에 미세한 저전압 전기 자극을 가해 이동 방향을 유도한다. CBS 뉴스 60 Minutes에 출연한 빌헬름 CEO는 이를 "바퀴벌레에게 백팩을 지워주고, 올바른 방향으로 살짝 넌지시(nudge)를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둘째, 모듈형 센서 페이로드다. 백팩은 임무 성격에 따라 마이크로 카메라, 마이크, 환경 센서(가스·온도 감지), 보안 통신 모듈 등을 자유롭게 교체·조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한 군집 내에서도 개체별로 역할을 분담할 수 있어, 어떤 바퀴벌레는 영상을 찍고, 다른 바퀴벌레는 통신 중계나 위치 파악을 담당하는 식이다. 셋째, 엣지 AI 처리 칩과 군집 자율성 소프트웨어가 탑재되어 있다. 초소형 AI 칩이 수집된 데이터를 사전 필터링해 통신 부하를 줄이고, 군집 조율 알고리즘을 통해 수십 마리의 바퀴벌레를 동시에 통제할 수 있다. 작전 지휘관은 개별 바퀴벌레를 일일이 조종할 필요 없이 목표 지점만 지정하면 군집이 자율적으로 임무를 수행한다. 전략적 함의…드론이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을 장악하다 군사 전문가들이 이 기술에 주목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기존의 소형 드론이나 지상 로봇은 붕괴된 건물 내부, GPS 신호가 차단된 지하 시설, 잡초가 무성한 붕괴 현장 등 접근 불가능한 환경에서 물리적 한계를 노출한다. 반면 바퀴벌레는 이러한 환경을 자연스럽게 통과한다. 음향·시각적 신호가 거의 없어 적의 방공망이나 감시 체계에 탐지될 확률이 극히 낮으며, 별도의 배터리나 연료 없이 생체 에너지로 움직이기 때문에 에너지 효율성 측면에서도 기계식 로봇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빌헬름 CEO는 CBS 인터뷰에서 "이 기술은 다른 어떤 시스템도 제공할 수 없는 능력을 부여한다"며, "거의 탐지가 불가능하고, 에너지 효율이 극대화되며, 거의 무제한으로 확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기계식 로봇은 공장 생산에 의존하지만, 생체 로봇은 원리적으로 번식을 통해 규모를 확장할 수 있어, 대량 배치 시 비용 측면에서도 획기적인 이점이 있다는 평가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 기술이 독일 국방비 대폭 확대와 궤를 같이한다는 것이다. 독일은 2029년까지 국방비를 1750억 달러(약 262조 원) 규모로 증액하고 NATO 권고 GDP 대비 3.5% 목표를 충족할 계획이며, 빠른 구매 절차를 위한 새로운 법률도 추진 중이다. 스웜 바이오택틱스는 이러한 독일의 방산 혁신 가속화 정책의 직접적 수혜자로 꼽힌다. 전장 너머…재난 구조·산업 검사까지 '이중 용도' 플랫폼 이 '사이보그 바퀴벌레'의 쓰임새는 비단 전쟁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스웜 바이오택틱스는 처음부터 군사 정찰, 재난 구조, 산업 시설 검사라는 세 가지 핵심 활용 분야를 제시했다. 지진이나 폭발로 붕괴된 건물에서 매몰된 생존자를 찾는 임무가 대표적이다. 겹겹이 쌓인 잔해 사이를 뚫고 들어가 생존자의 위치를 파악하고, 내장된 센서로 화학물질 누출 여부나 산소 농도 등 환경 데이터를 수집해 구조팀에 전달함으로써 인명 구조의 효율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다. 화학물질, 열, 방사선 등 위험한 환경에서도 바퀴벌레는 강한 생존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인간이 접근할 수 없는 구역에서의 임무 수행에 특히 강점을 보인다. 한편, 스웜 바이오택틱스는 바퀴벌레에 국한하지 않고 향후 메뚜기와 베짱이 등 다른 곤충으로의 확장도 검토 중이며, 비둘기나 상어 등 더 큰 생물체에 센서를 장착하는 방안도 연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리적 쟁점과 미래 전망 물론 풀어야 할 숙제도 적지 않다. 동물 복지 문제가 가장 먼저 제기되지만, 독일 동물보호법상 곤충은 포유류와 달리 보호 대상에 해당하지 않아 법적 제약이 상대적으로 느슨한 상황이다. 빌헬름 CEO는 "바퀴벌레들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며, 임무를 잘 수행하려면 건강하고 좋은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며 동물 복지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더 민감한 문제는 무기화 가능성이다. 빌헬름은 현재 회사가 정찰과 감시에 집중하고 있으며 폭발물 탑재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밝혔으나, 미래에 법적 틀 안에서 그러한 활용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사이버 보안 취약성, 무허가 감시 오남용 가능성, 생물무기 규제 프레임워크의 부재 등은 국제사회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바이오 로보틱스가 더 이상 SF의 영역이 아니라는 점이다. 드론이 하늘을 지배한다면, 바이오 로봇은 적의 발밑과 벽 너머의 정보를 장악할 것이다. 모리츠 슈트루비(Moritz Strube) CTO는 "우리의 목표는 어떤 지형, 위협, 임무에도 적응할 수 있는 확장 가능한 이중 용도 정보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미래 비전을 밝혔다. '살아있는 기계'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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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미상 씨의 즐거운 쿠팡(26회)
제26회 "창덕궁 후원이라니까 왜 자꾸 비원이래요?" "나는 비원이라는 이름이 좋아요. 창덕궁 후원이라는 본래 이름이 있고 비원은 일본인이 지은 이름이라지만 나는 비원이 더 멋진 이름이라 생각해요. 어쩐지 은밀하고 농염한 사연이 깃들어 있을 것 같은 그런 이름이잖아요." 지난 일 년 동안 미상 씨는 작품집을 출간했고 중고 승용차를 샀고 쿠팡 카플렉서로 돈을 벌며 소설을 썼다. 그러면서 희정 씨와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루는 맑은 날에 하루는 흐린 날이라는 말은 희정 씨의 건강을 가리키는 말이다. 마요트는커녕 북한산 둘레길도 갈 형편이 아니었다. 어떤 날은 멀쩡하다가도 어떤 날은 기진맥진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병원 진료가 점심시간 전에 끝나요. 그럼 걸어서 비원을 갈 수 있어요." 희정 씨의 지정병원은 창덕궁과 창경궁이 가까운 대학병원이다. 맑은 날이면 좋겠으나 설명 비 오는 날이라도 미상 씨는 비원을 관람하기로 했다. "승용차에 휠체어를 싣고 갈게요." 휠체어라는 말에 희정 씨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뇨. 걸어갈래요. 오늘부터 컨디션 조절을 잘해 그날은 걸어갈 수 있도록 하겠어요." "괜찮아요, 희정 씨. 희정 씨가 힘들면 내가 업고라도 갈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웃으면서 미상 씨가 덧붙여 말했다. "희정 씨 업고 먼 길을 가는 꿈을 수시로 꾸거든요. 어떤 날은 산을 오르고 어떤 날은 보랏빛 꽃이 만발한 바닷가 벌판을 걸어가요. 무겁다는 느낌은 없어요. 언제나 기쁘고 들뜨고 행복하죠. 내 등에 희정 씨를 업고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행복해요." 희정 씨도 웃었다. 꿈속에서 자신을 업고 어디론가 간다는 미상 씨의 고백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고 실제로 희정 씨는 미상 씨의 등에 업힌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사랑 때문이 아니라 아팠기 때문이지만 사랑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도 누군가를 업어주고 누군가의 등에 업히는지 모르겠어요. 요즘엔 아무도 누군가를 업지 않고 누군가에게 업히지도 않죠?" "그래요. 요즘엔 아이 엄마도 아이를 업는 경우가 없어요." 미상 씨의 단언에 희정 씨가 응수했다. "유모차가 있기 때문인가 봐요. 그래서 아이는 엄마 등의 따뜻함을 느낄 기회가 없어졌어요." "그래도 아이들은 유모차를 싫어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희정 씨는 휠체어라면 질색을 하는군요. 왜?" 여전히 웃음기 띈 얼굴로 희정 씨가 말한다. "전 이미 엄마의 따뜻하고 너른 등에 중독된 아이니까요. 그러니 쇠로 만든 휠체어라는 기계를 좋아할 리 없어요." 미상 씨의 눈을 바라보며 희정 씨는 못을 박는다. "그러니 날 휠체어에 태울 생각을 마세요. 난 내 발로 걸어가던가 엄마 등에 업혀 가든가, 아니면 미상 씨 등에 업혀 가든가 그 세 가지 방법밖에 몰라요." 벽에 걸린 커다란 숫자의 달력을 바라보며 희정 씨는 또 말한다. "다음 주 수요일은 이월이네요. 너무 춥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러면서 짧은 한숨을 쉰다. "벌써 이월이니 봄도 멀지 않았군요. 봄이 오면 날 업어주시던 우리 엄마 생신이 있어요. 그날은 해마다 아주 환한 봄날이었답니다. 올해도 반드시 맑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불고 온갖 꽃이 만발한 날일 겁니다." 돌아가신 희정 씨 엄마의 생신은 사월이다. 희정 씨는 그날만큼은 잊지 않고 가장 밝은색 옷을 입고 경기도 북부에 있는 공동묘원으로 간다. "올해 봄에도 지난해 봄처럼 미상 씨 등에 업혀 엄마를 만나러 가겠어요." 희정 씨 엄마의 생신이 있는 봄이 지나면 희정 씨 생일이 있는 여름이 온다. 지금 희정 씨의 처연한 눈빛에는 다가오는 봄과 여름을 건강한 몸으로 맞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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