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닳아 없어지는 것들의 뒷모습
피아노 픽사베이.jpg
피아노. 사진=픽사베이


소비된 빛

 

 

최규리

 

 

 

가위를 들고 다닌다

X자 형태의 별을 날렸지

우리는 새를 키우지 않았네

새는 잠시 타인처럼 왔다 가는 것

날렵하게 오려진 세계에서

다음 날에도 서로 끌어안고 공중돌기를 했다

합의점을 찾을 수 없었기에

개별적인 비를 맞았고

사형수의 마지막 한 끼처럼 소중한 식사를 한다

건반 위로 새가 날아 왔지만

페이지는 격렬하게 봉합되었다

사라진 페이지를 찾지 않기로 한다

죽는 날에 틀어질 음악 미리 듣기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3번

낙원상가 앞 횡단보도에서 활짝 피어

 

 

 

닳아 없어지는 것들의 뒷모습

 

낙원상가 앞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다 보면, 이 거대한 도시가 마치 조율되지 않은 악기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낡은 악기들이 켜켜이 쌓인 상가 건물 위로 자동차 경적과 사람들의 말소리가 뒤엉켜 쏟아지는데, 그 불협화음이 때로는 지독하게 고독한 음악처럼 들려오곤 합니다. 우리는 그 소란 속에서 각자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누군가는 어제 잘려 나간 관계를 생각하고 누군가는 내일 다가올 불안을 만지작거립니다.

 

가끔 타인과 마주 앉아 밥을 먹을 때, 저는 묘한 비장함을 느낍니다. 숟가락을 들어 따뜻한 밥을 입안 가득 넣고 씹는 당신과 나, 우리는 분명 한 식탁에 있지만 서로 다른 허기를 달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타인의 속마음까지 온전히 소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우리는 결국 각자의 그릇에 담긴 몫만큼의 고독을 삼켜야 합니다. 그것은 슬픈 일이라기보다는, 사형수가 받아 든 마지막 식사처럼 생의 가장 진실하고 투명한 순간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매일 자신을 조금씩 갉아먹으며 하루를 버팁니다. 뜨겁게 사랑했던 기억도, 날카롭게 베였던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닳고 닳아 무뎌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소모되는 과정이 꼭 허무한 것만은 아닐 겁니다. 초가 제 몸을 태워야만 어둠을 밀어낼 수 있듯이, 우리 역시 스스로를 치열하게 소진시킬 때 비로소 희미한 빛이라도 낼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지금 횡단보도의 파란 불이 켜집니다. 저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또다시 무언가를 태우며 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비록 그것이 엇박자로 걷는 걸음일지라도, 격렬하게 부서지는 파열음일지라도 괜찮습니다. 다 닳아 없어지는 순간까지, 우리는 멈추지 않고 이 소란스러운 연주를 계속해야 하니까요.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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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조민 시인의 시의 정원>을 연재하는 김조민 시인. 사진=프로필

 

 프로필 


2013년 《서정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미래서정문학상, 조지훈문학상,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한국예술위원회 문학창작산실 지원금 수혜. 웹진 시인광장 디카시 주간, 유튜브 (시읽는고양이) 크리에이터.



주요 작품

시집 『힘없는 질투』, 디카시집 『편복의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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