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리 파편 위를 걷는 맨발의 시간
모래시계
백현
검은 머리통들이 지하철 환승구를
물밀듯 쏟아져 내린다
병목을 다투어 빠져나가는
모래의 비명이 귀속에서 웅웅거린다
시간 앞에서 인간이 바치는
온몸이 떨리는 갈증과 조바심
피 흐르고 불타던 전장의 잔혹함이 묻히고
사구를 흐르는 모래 물결과
느릿한 낙타의 발자국이 이어지고
오직 모래의 무심을 빌어 다시 채워지는
병 속의 시간
한 알 한 알 모래가
떨어져 내리는 순간을 초조하게 기다린다
모래를 끌어 내리는 중력이
나를 빨아들이고
무수한 모래가 칼끝이 되어 살갗을 파고든다
시간의 병 속에 담겨있는 내 머리가 보인다
망치를 들어 모래시계를 깨트린다
발밑에서 천 개의 시간이 번뜩인다
천 개의 나를 딛고 선다
유리 파편 위를 걷는 맨발의 시간
우리는 모두 어딘가로 쏟아져 내리고 있습니다. 아침이면 알람 소리에 놀라 이불 밖으로 쏟아지고, 현관문을 열고 거리로 쏟아지며, 다시 좁은 지하철 문틈으로 몸을 구겨 넣습니다. 거대한 중력이 등 떠미는 것 같지만, 사실 우리를 밀어내는 건 '늦으면 안 된다'는 스스로의 조바심일지도 모릅니다.
가만히 있어도 늙어간다는 사실이 때론 참을 수 없이 억울해질 때가 있습니다. 좁은 병목을 통과하려 서로의 어깨를 부딪치며 깎여나가는 모래알처럼, 우리는 매일 조금씩 더 작아지고, 더 고운 가루가 되어갑니다. 그렇게 부드러워진다는 건, 어쩌면 나를 잃어간다는 말의 다른 표현 아닐까요.
문득, 나를 가두고 있는 이 투명한 벽이 숨 막히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정해진 구멍으로 얌전히 빠져나가기를 거부하고, 무서운 속도로 떨어지는 중력을 거스르고 싶어집니다.
흐르는 대로 휩쓸려 가는 대신, 차라리 멈춰 서서 와장창 그 벽을 깨뜨리는 상상을 합니다. 비록 날카로운 파편 위에 맨발로 서게 될지라도, 누군가 뒤집어주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딛고 선 그 찰나의 순간을 온전히 움켜쥐고 싶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시간의 틀을 깨고 나온 사람만이 비로소 자신의 발바닥으로 설 수 있습니다. 그 바닥이 비록 피가 흐르는 유리밭이라 해도 말입니다.
당신의 시계는 지금 흐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당신이 그 시계를 쥐고 있습니까.
<편집자주>
프로필
2013년 《서정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미래서정문학상, 조지훈문학상,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한국예술위원회 문학창작산실 지원금 수혜. 웹진 시인광장 디카시 주간, 유튜브 (시읽는고양이) 크리에이터.
주요 작품
시집 『힘없는 질투』, 디카시집 『편복의 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