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일상 속, 개봉작을 놓친 당신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있다. <이수정의 시네bar 천국>은 혼술하며 OTT 영화를 보는 당신을 위한 코너다. 퇴근 후 와인 한 잔, 주말 저녁 위스키 한 잔 곁들여 스크린을 응시하는 시간. 혼자 마시는 술이 외로움을 뜻하지 않듯, 혼자 보는 영화는 고독을 의미하지 않는다. 코너의 끝에서 영화와 페어링되는 술 한 잔을 제안하는 것은 덤. 자, 잔을 채우시라. 스크린이 당신을 기다린다. <편집자주>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 전쟁의 상흔과 재생의 윤리
미야자키 하야오는 거짓말쟁이다. 은퇴와 번복을 거듭하는 많은 예술가가 그렇듯. 2013년 <바람이 분다>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지만, 2023년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내놓으며 다시금 관객 앞에 섰다. 이는 창작의 고통과 환희로 회귀하는 눈물겨운 몸부림이자. 자기 부정과 긍정의 정반합에 선 예술가의 고뇌다. 이 작품은 그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관통하던 주제들-전쟁의 기억, 환경 파괴, 생명의 존엄, 소년의 성장-이 집대성된 자전적 성찰의 결과물이다. 초등학생 시절 요시노 겐자부로의 동명 소설을 읽으며 평생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천착해 온 감독은, 80대에 이르러서야 자신만의 답을 제시한다.
영화는 태평양전쟁 말기, 어머니를 화재로 잃은 소년 마히토가 시골 저택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된다. 그곳에서 마히토는 신비로운 탑을 발견하고, 푸른 왜가리의 인도로 이세계(異世界)에 들어간다. 그 공간은 현실의 대안적 공간이 아니라 현실과 맞닿아 있는 또 하나의 세계다. 그곳에서도 폭력과 생존 논리, 선악의 구별은 여전히 작동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영화를 통해 전쟁 세대가 짊어진 죄의식, 그것이 후손에게 전가되는 방식,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윤리를 모색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현실과 환상 세계는 분리된 공간이 아니다. 두 세계는 시공을 초월해 맞닿아 있으며, 과거와 현재, 미래가 서로를 침식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보여준 경계의 모호함은 이 작품에서 한층 더 발전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 신들의 세계로 들어가는 터널이 명확한 경계였다면, 마히토가 발견한 탑은 현실과 환상,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는 통로다.
이세계 역시 폭력과 선악, 생존 논리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곳은 현실의 대안이 아니라 현실의 연장선에 놓인 또 하나의 세계다. 와라와라들이 태어나는 공간은 생명을 품는 신성한 장소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생존을 위한 포식이 벌어지는 잔혹한 현장이기도 하다. 펠리컨들이 와라와라를 삼키는 장면은 자연의 섭리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먹이가 부족하다는 생태적 결핍이 자리한다. 이는 제국주의적 침탈의 은유로 읽힌다. 떼 지어 나는 펠리컨은 전투기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들 역시 결핍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를 단순화하지 않는다. 일본의 모든 인민이 제국주의자는 아니며, 모든 폭력이 순수한 악의에서 비롯되지는 않는다. 이러한 복잡성은 전쟁 세대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을 반영한다. 그는 "한 시대를 살아냈다고 해서 무조건 죄를 안고 살아야 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라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전쟁 세대의 업보를 가지고 살아가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를 단순화하지 않는다. 이러한 시각은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제시한 '악의 평범성' 개념과도 공명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전쟁 세대를 단순히 가해자로 단정하기보다는, 그들이 놓였던 구조와 맥락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에 녹아든 이런 사유는 제국주의를 경험한 한국 관객들에게는 여전히 불편하게 다가온다. 이 양가성이 주는 불편함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해소되지 않고 남아있다.
영화에서 마히토의 몸에 남은 상처는 개인적 고통을 넘어선다. 그것은 종전 세대의 죄의식이 후손에게 전가된 결과이자, 자기 학대의 형태로 드러난 집단적 원죄다. 마히토가 스스로에게 가하는 폭력은 단순히 어머니를 잃은 슬픔의 표현만은 아니다. 그것은 세대를 초월해 전승되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체현한다.
초반의 화염 장면에 등장하는 흔들리는 인물들은 마치 원자폭탄으로 죽은 망령들을 연상시킨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1941년생으로, 전쟁을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전후 일본 사회를 살아온 세대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전투기 부품 공장을 운영했고, 이는 어린 미야자키에게 복잡한 감정을 남겼다. 전쟁은 그에게 원죄이자 창작의 원천이다.
영화에서 불은 단죄의 이미지로 쓰인다. 키리코는 불의 채찍을 써서 앵무새들을 무찌르고, 히미 역시 불로 펠리컨들을 물리친다. 불은 파괴와 정화, 재생의 이중적 상징이기도 하다. 어머니를 앗아간 화재는 마히토에게 상실의 기억이지만, 동시에 그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계기가 된다. 불은 과거를 태우지만, 그 재 위에서 새로운 생명이 싹튼다. 와라와라들이 태어나는 환상 세계는 생명을 품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폭력이 작동하는 장소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태생적인 죄의식을 품은 전쟁 세대의 업보를 증오한다. 그는 전쟁 세대를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은 그의 부모 세대이며, 그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 근간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는 그들이 저지른 폭력과 그 결과를 외면할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와라와라들은 계속 태어날 것이고, 나츠코의 산실에서는 아이가 태어날 것이다. 생명은 역사적 죄의식과 무관하게 계속 탄생한다. 이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일관된 태도다. <모노노케 히메>에서 "살아라"는 대사가 울려 퍼졌듯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역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한다.
상실을 겪은 이는 마히토뿐만 아니다. 히미는 자신의 미래를 알면서도 불 속으로 돌아가고, 큰할아버지는 자신이 쌓아 올린 세계가 붕괴하는 것을 목도한다. "나를 배우는 자는 죽는다."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일은 그토록 힘든 일이며, 마치 죽음과도 같은 통과 의례를 거치는 일이다. 진실한 사람은 '죽음의 냄새'를 풍긴다. 이는 자기 성찰이 수반하는 고통을 상징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반성하고 괴로워하면서도 다시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미야자키 하야오가 제시하는 윤리적 명제다. 죄의식을 안고 살기란 잔인하지만, 그것을 망각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다. 역사적 책임은 개인에게 가혹한 짐이다. 그 짐을 짊어지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길이다.
히미는 불로 악을 단죄한다. 그녀는 그 불이 자신을 삼키리라는 미래 역시 예감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현실로 돌아간다. 이 선택은 완벽한 세계를 포기하고, 불완전한 현실을 감당하겠다는 윤리적 결단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를 통해 진정한 용기란 미래를 모르는 상태에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알면서도 그것을 감당하겠다고 결단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마히토 역시 환상 세계에 남을 기회를 거부하고 현실로 돌아온다. 그곳에는 어머니도 없고, 계모와의 관계도 여전히 어색하며, 전쟁의 그림자는 날로 짙어져 간다. 하지만 그는 그 불완전한 세계를 선택한다. 이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 직면이며,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영화는 명확한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마히토는 현실로 돌아오지만, 그의 상처가 치유된 것은 아니다. 히미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이 행복한 결말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큰할아버지의 세계는 무너지지만, 그가 틀렸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모든 선택에 대가가 따르며, 모든 윤리적 결단이 불완전하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이것이 미야자키 하야오가 평생 추구한 윤리이며, 이 영화가 던지는 궁극적 메시지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완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매 순간 새롭게 물어야 하는 질문이며, 답은 각자의 삶 속에서 찾아야 한다.
와라와라들은 계속 태어날 것이고, 나츠코의 아이 역시 탄생할 것이다. 생명은 멈추지 않고, 역사는 계속된다. 전쟁 세대의 업보를 짊어진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제 80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질문을 던진다. "나를 배우는 자는 죽는다"라는 말처럼, 자기 성찰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야말로 진실하게 사는 길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유언장이 아니라 후대에게 주는 질문을 담은 연서다. 완벽한 세계는 불가능하다. 선악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윤리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 불완전한 현실을 감당하며 살아가야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당신에게 여전히 당신에게 묻는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와 함께라면, 일본 싱글 몰트 위스키 한 잔을 권한다. 산토리의 야마자키(山崎)나 닛카의 요이치(余市)면 더욱 좋다. 이 영화는 서두르는 법이 없다. 질문을 던지되 답을 강요하지 않으며, 감동을 쥐어짜지 않는다. 좋은 싱글 몰트 위스키가 그렇다. 처음 한 모금은 낯설고 복잡하지만, 천천히 음미할수록 깊이를 드러낸다. 오크통 안에서 수십 년을 기다린 술처럼,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평생의 질문을 이 한 편 안에 조용히 응축해 넣었다. 얼음도, 물도 넣지 않는 니트(neat)로 마실 것. 전쟁의 기억과 생존의 윤리를 희석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이 영화의 태도처럼.
<필자 소개>
이수정
이화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에서 수학했다. 서평가이자 영화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 영화와 문학을 주제로 한 행사(북토크, 강연 등)를 기획하고, 오이코스 인문연구소에서 <영화잡담회>를 진행한다. 극장보다 거실에서, 팝콘보다 와인잔을 든 채로 더 많은 영화를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