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면의 밤은 길다

2 '더파든'의 장
불면의 밤 그리고 다음 날
허민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위스키 더블 한잔을 하고 잠을 청했을 것이다. 언제나 그에게 편안한 밤을 가져다주는 우아한 친구, 위스키 더블 나이트캡(Nightcap).
그러나 오늘은 아니었다.
뉴스 화면에 비추어졌던 '백설이'를 닮은 고양이의 눈빛이 그를 사정없이 흔들고 있었다. 이런 것을 영혼까지 흔들린다고 하는 걸까? 이제 곧 엄청난 운명의 파도에 휩쓸릴 것 같은 예감. 그에게 던져진 메시지의 실마리를 찾아내어 우연이라는 비겁의 고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체화된 스파이의 본능이 그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위스키 더블' 대신에 '커피 리스트레토 도피오'가 필요했다. 세상에 알려진 이래 잠이라는 유혹으로부터 인간의 정신을 지켜온 음료인 커피. 그러나 중세 카톨릭에서는 커피를 악마의 음료라고 금지했었다. 검은 색깔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 너무 맑은 인간의 정신은 비신앙적이라 생각했을까?
허민 그는 지금 악마의 음료가 주는 도움이 필요했다. 아프가니스탄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야 했다.
지금 그에게는 해외지부도 거점도 첩보망도 협조자도 공작금도 없다.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해결해야 한다. 진하디 진한 커피만이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이었다.
밤새도록 인터넷을 뒤졌다. 국내의 뉴스, 블로그, 페이스북, 정부와 민간 연구소, 공보기관, 적십자사, 난민 돕기 NGO, 국경 없는 의사회, 국제기구 등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래서 해외를 뒤졌다. 최소한 영어와 일본어로 뒤질 수 있는 능력은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드디어 꼬리를 잡았다. 영국의 어느 무명 연구소 홈페이지에 들어 갔을 때였다. 스파크가 튀었다.
"그래, 이거야! 바로 이거야!"
연구소 홈페이지의 한 구석에 던져진 듯 놓여 있던 반 페이지짜리 메모. '제임스 본드'라는 닉네임을 쓰는 연구원이 관련사항에 대한 제보를 해달라며 올려 놓은 메모였다.
바로 그가 찾던 것이었다.
"아프가니스탄의 무장세력 '호라산 칼리프 분파(Khorasan Caliphate Faction)'에서 이탈한 신생 무장세력 '주눈 알-삼(Junud al-Samm)'이 힌두쿠시 북쪽 고원지대 마을 수 군데를 공격해서 수백 명의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타지키스탄과 파키스탄으로 탈출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짤막한 메모였다. 배경 설명도 평가도 없는 몇 줄짜리 메모.
2021년 8월 31일 미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하면서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국제적 관심은 멀어졌다. 이제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스스로 해결해야 할 내부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언론에서도 별 관심을 갖지 않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무장세력 간에 충돌이 발생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일부 주민들이 파키스탄으로 탈출하였다'라고 간략하게 추상적으로 보도하는 것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허민이 악마의 음료의 도움을 받아 밤을 새워가며 찾아낸 메모. 그 짤막한 메모가 허민의 정보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었다. 최고의 정보는 극한 상상력의 결과물이다.
정보는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소리가 없고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다. 그것은 선명한 신호가 아니라, 무심코 지나칠 수 있는 작은 틈새와 흔적의 형태로 존재한다. 파쇄처리를 기다리는 서류의 귀퉁이에 누군가 끄적인 낙서, 무심코 넘긴 보고서의 각주, 의미 없어 보이는 통화 기록, 무심코 내뱉는 신음과 한숨, 괜히 책상 모서리를 쓰다듬는 버릇. 그것들은 사실과 사실 사이의 공간에, 그리고 글귀와 대화의 행간에 존재한다.
그러나 상상력이 개입하는 순간, 그 흔적들은 하나의 진실된 실체를 드러낸다. 정보의 상상력은 허구를 만드는 능력이 아니라, 아직 현실이 되지 않은 가능성을 알아내는 능력이다.
9.11 테러 때에도 산만한 경고와 흔적은 존재했다. 다만 그것을 연결하는 통찰의 부재가 있었을 뿐이다. 정보의 실패는 종종 첩보와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상상력의 빈곤에서 비롯된다.
허민은 상상했다. 허황된 망상이 아니라 정보적 상상이었다.
"북부 아프가니스탄 고원지대 마을에서 탈출한 난민들이 타지키스탄과 파키스탄으로 유입되고 있다면, '바다흐샨' 주의 '판지' 강 상류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그곳은 국경에 가까워 중앙의 통제가 미치지 못하는 데다 깊은 '바르다르' 협곡이 존재하는 산악지대이다. 따라서 대규모 무장세력에서 이탈한 강경한 신생 무장세력이 거점으로 삼기에 매력적인 곳이다. 특히 협곡을 통과하여 타지키스탄으로 연결되는 마약 밀수 루트가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지역을 장악하려 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상당하다."
그렇다면?
허민의 잠정적 판단에 따르면, 그곳은 한때 허민이 있었던 곳이었다.
15년 전 인질 구출협상에 성공하고 복귀하는 과정에서 다른 과격 세력의 공격을 받아 총상을 입었던 곳. 한국과 미국 한인교회 연합 선교단 12명이 인질로 잡히는 바람에 CIA가 개입할 수밖에 없었던 곳. 그래서 허민 그가 '게일의 까마귀 코르'라고 부르던 CIA 파트너 '코르맥 오로크'와 함께 갔던 곳.
그리고 당시 허민의 팀이 협상을 성공할 수 있도록 반대 세력을 설득하여 도와주었던 '알-다르바리' 부족이 거주하는 지역.
"그곳으로 가야 해! 무언가 나를 그곳으로 이끌고 있어!"
허민이 신음하듯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곳으로 간다는 말인가?
그러나 언제나 길은 있어왔고, 또 새로이 열린다. 운명의 손을 잡는다면 운명이 그를 이끌 것이다.
마침 동쪽의 바다를 박차고 오르려는 태양의 빛이 산등성이와 하늘의 사이를 타고 흘러와 허민의 창에 희미한 신호를 던지고 있었다.■
<편집자주>
하이브리드 소설 『더파든의 스파이』는 은퇴한 스파이의 헌신에 대한 이야기다.
스파이는 대의의 깃발 아래 활동한다. 그 대의가 국가든 이념이든 정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느 날 대의의 깃발이 내려졌을 때 종종 스파이들은 버려진다. 때로는 제거되기도 한다. 영화나 소설에서는 총과 칼이 동원되지만 현실에서는 법이라는 도구가 주로 사용된다.
그러나 대의의 깃발이 다시 올랐을 때, 스파이는 그들을 버렸던 세상의 싸움에 다시 나선다. 스파이의 숙명이다.
주인공 허민은 육십 대 초반 나이의 버려진 스파이다. 동해안의 소도시에 은거하여 정원을 가꾸며 산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대의의 깃발이 올랐다. 신물질 마약의 탄생을 막아 세상을 구해야 한다. 종래의 마약이 인간의 정신을 파괴하였다면 신물질 마약은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다. 신의 영역을 건드리는 일이다.
이야기는 강릉의 조그만 농장 정원 '더파든'을 베이스캠프로 하여 힌두쿠시산맥과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전 세계를 무대로 펼쳐진다.
아프가니스탄 부족장의 딸 '자흐라', 전 CIA 부국장으로 비정부기구 STC(Save the Cat)의 집행위원인 '코르맥 오로크', 태양신 '라'의 현신으로 물리학 교수이며 STC의 설립자인 '엘리아스 워드' 그리고 고양이 머리를 한 이집트 신 '바스테트'의 눈인 세상의 수많은 고양이들이 스파이의 여정에 함께 한다.
■ 작가 프로필
김남수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미국의 조지 메이슨 대학(GMU)에서 공부했다.
육군과 국가기관에서 31년간 국가의 업무에 봉직하였다.
은퇴 후 기업과 금융기관에서 자문역으로 일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고향에 있는 대학교에 강좌를 열고 본인이 태어난 마을이 바라보이는 강의실에서 학부와 대학원생들에게 테러리즘과 범죄정보에 대해 강의하였다.
지금은 아버지가 물려준 아담한 땅에 농장 정원 '더 파든'을 가꾸면서 가드닝 잡지에 정원 에세이를 기고하고 있다.
이제 하이브리드 스파이 소설을 시작한다. 이것저것 섞어 사실 같으면서 사실 아닌 이야기를 꾸미고,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 이야기를 허구로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