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라앉은 자리, 거침없는 유영이 시작되고

상어 픽사베이.jpg

상어. 사진=픽사베이


드디어 상어가 되었다

 

 

노해정

 

 

 

머리 꼭대기까지 피가 몰리고 화끈거리며

가슴은 차디찬 얼음장처럼 변해가는

나를 보았지

 

아무도 내 말을 들어주려 하지 않을 때

마치 빙벽 속에 갇힌 것처럼

뜨거운 핏줄기는 꽁꽁 얼어가고

납덩이보다 무거워진 머릿속

겹겹이 쌓인 빙판을 뚫고

깊디깊은 심해 속으로 내 몸을 끌어들이지

 

깊은 곳에서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숨 쉬게 되고

매우 느린 속도로 몸을 계속 움직일 수 있게 돼

가라앉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야

그냥 그렇게 움직여지는 거야

 

심해의 바닥에 도달하는 것은

세상을 등지거나 삶을 포기하려 하는 것도 아니야

엄청난 수압에 짓눌리면서도

견뎌내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면

오히려 가슴이 뭉클해질 거야.

 

어느 순간

상어가 된 나를 느끼게 돼

 

" 양식장에 갇힌 철갑상어가 아닌 북극해에 사는 상어 "

 

떠오르다 보면

나와 같은 모습을 한, 무리를 만나기도 해

나의 친구일지도 애인일지도 부모일지도 모르는

저들의 유영은 늠름하고 아름다워

 

계속 떠오르다 보면

싱싱한 피 냄새도 느낄 수 있어

 

"물개를 사냥하는데 정신이 팔린 북극곰"

 

서서히 다가가 턱을 크게 벌려

꿀꺽 삼킬 수도 있지

 

대박이지?

 

나는 상어가 되었으니까

 

 

 

가라앉은 자리, 거침없는 유영이 시작되고

 

누군가의 마음을 두드리다 끝내 닿지 못하고 얼어붙은 말들은, 어느새 무거운 납덩이가 되어 기어코 나를 바닥으로 끌어내립니다. 변명조차 삼켜버린 캄캄한 밤, 우리는 각자의 외로운 심해로 속수무책 가라앉곤 하지요. 숨이 턱턱 막혀오는 이 서늘하고 막막한 하강의 시간은 마치 영원할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바닥에 등짝이 닿을 때쯤, 문득 묘한 평온이 찾아옵니다. 온몸의 뼈를 으스러뜨릴 듯한 수압 속에서 발버둥 치기를 멈추는 순간, 요란했던 세상의 소음은 거짓말처럼 음소거가 되거든요. 그리고 비로소 그 고요의 틈바구니로 내 안의 가장 깊고 묵직한 고동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끝이라고 생각했던 캄캄한 밑바닥이 실은 전혀 다른 방식의 호흡을 배우는 출발점이었던 셈입니다.

 

차갑게 식어버렸다고 믿었던 심장이 그 지독한 고독 속에서 가장 맹렬하게 깨어나는 경이로움이란, 길들여진 수조 안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감각입니다. 상처의 무게를 견디며 스스로 단단해진 이들은 더 이상 가라앉지 않기 위해 허우적거리지 않습니다. 그저 거대한 물결에 몸을 맡긴 채 느릿하고도 우아하게 유영할 뿐이지요.

 

이 묵묵한 유영의 길목에서 우리는 가끔, 나와 닮은 상처를 지느러미 삼아 헤엄치는 무리를 마주치기도 합니다. 바닥까지 가라앉아 본 이들만이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서늘한 온기. 그 곁을 나란히 헤엄치다 보면 웅크렸던 두려움은 어느새 서슬 퍼런 야성으로 벼려집니다. 나를 옥죄던 거대한 슬픔도,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던 세상의 잣대도 크게 입을 벌려 단숨에 삼켜버릴 수 있을 것 같은 압도적인 생명력을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보이지 않는 빙벽에 갇혀 홀로 시린 시간을 앓고 있다면, 너무 억울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당신을 짓누르는 그 무거운 삶의 무게는 당신을 침몰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장 늠름하고 맹렬한 지느러미를 길러내는 중일 테니까요. 머지않아 차가운 수면 위로 불쑥 솟구쳐 오를, 거침없는 당신의 탄생을 가만히 기다려 봅니다.

 

 

 

<편집자주>

 


김조민 시인.jpg
<김조민 시인의 시의 정원>을 연재하는 김조민 시인. 사진=프로필

 

프로필 


2013년 《서정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미래서정문학상, 조지훈문학상,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한국예술위원회 문학창작산실 지원금 수혜. 웹진 시인광장 디카시 주간, 유튜브 (시읽는고양이) 크리에이터.



주요 작품

시집 『힘없는 질투』, 디카시집 『편복의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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