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하지 않은 사랑
제2회
어제 저녁 무렵 함께 저녁밥을 먹을 때 희정 씨가 말했다.
"미상 씨, 미상 씨는 희생이란 말을 들으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죠?"
두 사람은 깍두기를 반찬으로 카레로 비빈 햇반 쌀밥을 먹고 있었다. 희정 씨는 미상 씨가 자신의 입에 떠넣어 준 카레밥을 씹으며 깍두기를 기다리는 참이었다. 희정 씨의 입으로 배달 갔다 돌아온 숟가락으로 깍두기 한 알을 퍼담으며 미상 씨가 대답했다.
"저는 청나라 상선 뱃머리에 올라선 심청이 떠올라요."
웃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폭풍우 치는 인당수 위 까마득한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처녀."
그러자 희정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도 사랑이네."
미상 씨가 내미는 숟가락에 담긴 깍두기를 향해 입을 가져가던 희정 씨는 동작을 멈추고 다시 말했다.
"저는 희생이란 말을 들으면 사랑이란 말이 생각나요. 그러면서 영화 한 장면이 떠오르죠. '엘비라 마디간'이란 스웨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요."
"그래요. 그 영화 전에 우리가 같이 봤잖아요."
두 사람은 지난해 여름 『엘비라 마디간』을 보러 상암동 시네마테크 KOFA에 갔다. 그때는 마침 희정 씨의 병세가 완화됐었고 기분 탓이었는지 특히 그날은 왼손도 오른손도 떨지 않았다. 걸음걸이도 정상인 못지않았으며 밝게 웃었고 미상 씨가 입혀준 자줏빛 원피스 자락을 두 손으로 집어 들며 의자에 앉아 아메리카노에 소라 빵을 먹었다. 희정 씨가 그 영화에 대해 말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잡초 사이로 폴폴 날아가던 그 흰나비가 떠올라요."
그러더니 미상 씨의 왼쪽 뺨에 자신의 오른손 손바닥을 대며 또 말한다.
"이렇게…… 여주인공이 이렇게 손을 뻗자 남자는 머리를 기울여 고양이처럼 그 손바닥에 뺨을 문지르잖아요. 그 바보 같은 남자가."
미상 씨는 왼쪽으로 머리를 기울여 희정 씨의 떨리는 오른손을 자신의 뺨과 어깨 사이에 가두었다. 그러면서 미상 씨가 말한다.
"그 남자 주인공은 군복을 입고 있을 때가 멋졌어요. 군복을 벗으면 좀 촌스러워요. 순하기만 한 촌놈같이 생겼어요."
오른손을 미상 씨의 뺨과 어깨 사이에 끼워둔 채 희정 씨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예고 없는 솟아난 맑고 굵은 눈물방울이 그녀의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때 그 남자의 눈이 바로 그런 뜻을 담고 있었어요. 희생.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성스러움."
입안에 남아 있던 깍두기 조각을 꿀꺽 삼키며 희정 씨가 말했다.
"사랑해요, 미상 씨."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나 희정 씨의 몫이었다. 사랑하고 있었으나 미상 씨는 한 번도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 물론 희정 씨는 그런 미상 씨의 숫된 태도의 저변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한 번도 사랑을 확인하거나 사랑한단 말을 해달라고 투정 부리지 않았다. 왜?
"고마워요. 미상 씨."
그렇다. 희정 씨는 미상 씨의 순결한 희생의 내막이야말로 자신을 향한 사랑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새해 들어 희정 씨는 서른네 살로 미상 씨보다 네 살 더 많은 연상의 여인이다. 가난한 처지에 병든 몸이건만 나이로 치자면 아직은 생생한 서른네 살 짜리 양띠 처녀다. 하지만 상태가 대단히 좋지 않다. 병자의 몸으로 돌보는 사람 아무도 없는 처지인 데다 산등성이 재개발지역 낡은 빌라 반지하 월세방에서 홀로 사는 기초생활수급자 신분이었다. 하루에 한 번 복지관에서 배달해 주는 도시락으로 연명하건만 그 밥도 혼자 먹기 힘들었다. 희정 씨가 앓고 있는 다발성 경화증은 반신불수에 거동마저 불편한 불치병으로 늘 누워지낼 수밖에 없다. 현재 희정 씨를 보살펴주는 사람은 같은 빌라 2층에서 고양이 두 마리와 함께 사는 소설가 미상 씨뿐이다.
<편집자 주>
심상대는 1960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고 고려대 세종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90년《세계의 문학》봄호에 단편소설 세 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소설집 여섯 권과 산문집 두 권, 중편소설 『단추』와 장편소설 『나쁜봄』,『앙기아리 전투』,『힘내라 돼지』를 출간했습니다. 2001년 단편소설「美」로 현대문학상, 2012년 중편소설「단추」로 김유정문학상, 2016년 장편소설『나쁜봄』으로 한무숙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프로필 요약
출생: 1960년 1월 25일, 강원도 강릉시.
학력: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 졸업. 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석사 수료.
등단: 1990년 《세계의 문학》 봄호에 단편소설 3편 발표.
주요 수상
2001년 현대문학상(단편 「美」).
2012년 김유정문학상(중편 「단추」).
2016년 한무숙문학상(장편 『나쁜봄』).
주요 작품
소설집 『묵호를 아는가』,『사랑과 인생에 관한 여덟 편의 소설 』,『명옥헌』, 『망월』, 『심미주의자』, 『떨림』, 장편 『나쁜봄』, 『앙기아리 전투』, 『힘내라 돼지』, 중편 「단추」 등.
작품세계 짤막 소개
심상대의 소설은 치밀한 문장과 심미적 감각, 그리고 존재론적 질문이 결합된 "심미주의자"적 세계관으로 자주 설명됩니다. 초창기 단편에서는 감각적이고 실험적인 서사와 미학이 두드러졌고, 「단추」 같은 중편에서는 비정규직 청년, 시간강사, 가난과 실업 등 현실의 불안을 다루면서도 꿈과 악몽, 알레고리를 통해 삶의 근원적 의미를 묻는 방식이 특징입니다.
장편 『나쁜봄』과 『힘내라 돼지』에서는 개인의 죄의식, 사회적 폭력, 수용소·교도소 같은 극단적 공간을 배경으로 절망 속에서 인간 존엄과 희망을 찾는 서사를 보여 줍니다. 전반적으로 현실의 피폐함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도, 고독과 사유를 통해 고통을 넘어서려는 의지를 탐구하는 냉정하면서도 서늘한 문학 세계라 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