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벼랑 끝에서 배운 뿌리의 무게

나무 픽사베이.jpg

나무. 사진=픽사베이

 

하루 끝에 서서

 


한성근

 

 

 

갈피를 잡지 못한 생각들로 하루를 꽉 채우는 동안에도

바람은 아직 잦아들지 않았는데

누군가 쏟아낸 눈물 서너 방울 여울져 간다

기를 쓰고 속을 태워 살아가는 방법에만

열중하기로 마음 굳힌 모양이다

 

낯선 변방의 길섶 따라 내딛은 발이 얼어붙을 적마다

구겨진 걸음 속에서 저릿한 한숨 소리 들려올 뿐

복원되지 않은 옛 시절과 금세 겹쳐진다

 

머물러본 적 없는 길의 끄트머리에서 오롯이 한 번쯤은

때 절은 박수갈채라도 받기 위해

어디선가 본 듯한 땀방울로 기다리는 법 깨달아 본 들

한낮의 침묵 속에 묻어 둔 회한만 하랴만

 

볶아치던 얄망궂은 숨결 어떻게 달래야 할지 궁글리다가

저무는 가을녘 서걱거리는 갈대처럼 제 몸 흔들어

비워낼 순 없을까 새삼스레 서둘러 본다

 

어금니 깨물어가며 바르다고 믿어 어렵사리 선택했다면

종작없이 마구 따라오던 그림자를 돌려세워

가슴 한구석에 깃든 물갈퀴 같은 힘줄 북돋워 주듯

 

숨길 수 없는 진실과 각을 세운 거짓의 틈바구니에서

되바라진 날들 달래려 한 시선은

지워질 약속을 깨뜨릴지도 몰라 못 본 척하자

 

벼랑에 선 나무가 더 두텁게 뿌리내린단 사실 성찰하여

서로 의존하고 힘 모아 하나를 이룬다는

삶의 본보기가 될 말들 서늘한 전율에 아로새겨

더 이상의 날선 반목은 뿌리칠 수 있도록

 

박음질한 옷깃 사이로 감기우는 눈에 어려 여운에 쌓인

보이지 않을 만큼의 면면을 낱낱이 비춰

혼자 남겨질 두려움까지 다시금 지워야 할 것 같아

낯설게 느껴지는 하찮은 것에도 두루 걸림이 없게

분별없어진 열망했던 날들은 시방 지워 버리기로 하자

 

 

 

벼랑 끝에서 배운 뿌리의 무게

 

살다 보면 유독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 날이 있습니다.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 혹은 스스로 정한 기준에 도달하려 자신을 사납게 몰아세우며 지내온 시간들이지요.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 미덕이라 믿으며 숨 가쁘게 지내다 보면, 문득 걸음을 멈췄을 때 발밑이 텅 빈 허공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오곤 합니다. 정작 나를 돌보는 일보다 나를 증명하는 일에 더 몰두하느라, 내 안에서 서걱거리며 울어대던 작은 신호들을 애써 외면하며 살아온 것은 아닌지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스칩니다.

 

우리는 늘 무언가를 채우고 성취하는 것에만 전전긍긍하며 삽니다. 화려한 박수갈채나 타인의 인정 같은 것들이 삶의 유일한 정답인 양 매달리지만, 사실 우리를 지탱하는 진짜 힘은 가장 위태로운 지점에서 길러지기도 합니다. 언젠가 길가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린 나무 한 그루를 본 적이 있습니다. 척박한 바위틈에서 비바람을 견디기 위해 제 몸보다 몇 배나 깊고 단단하게 땅 밑으로 뿌리를 뻗어 내린 그 나무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겪는 시련과 고독 또한 실은 내면을 더 견고하게 만드는 숙련의 과정일지도 모른다고 말이지요. 위태로움은 결코 실패가 아니라, 더 깊어지라는 자연의 신호였던 셈입니다.

 

이제는 정답이라고 믿으며 팽팽하게 붙들고 있던 긴장의 끈을 조금 늦추어 보려 합니다. 타인의 시선에 맞추느라 억지로 지어 보였던 표정들을 하나둘 걷어내고, 대신 내 곁의 아주 작고 하찮아 보이는 것들에게 다정한 눈길을 나누어 주는 연습을 시작합니다. 대단한 성취가 없어도,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오늘 하루 무사히 내 몫의 길을 걸어온 스스로의 어깨를 가만히 다독여 주는 시간은 그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혼자 남겨질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에 떨기보다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 실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그 서늘하고도 벅찬 진실을 믿어보고 싶습니다. 날 선 마음을 내려놓고 욕망을 비워낼 때, 비로소 보이지 않던 내 삶의 진정한 무늬들이 선명하게 살아나기 마련입니다. 저무는 하루의 끝에서, 지친 나 자신에게 "참으로 애썼다"는 인사를 건네며 내일로 향하는 단단한 뿌리 하나를 마음속에 조용히 심어봅니다.

 

 

 

 

<편집자주>

 

김조민_프로필.jpg
<김조민 시인의 시의 정원>을 연재하는 김조민 시인. 사진=프로필

 

프로필

 

2013년 《서정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미래서정문학상, 조지훈문학상, 한국시인협회 젊은시인상. 한국예술위원회 문학창작산실 지원금 수혜. 웹진 시인광장 디카시 주간, 유튜브 (시읽는고양이) 크리에이터.

 

 

주요 작품

시집 『힘없는 질투』, 디카시집 『편복의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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